남의 일기 스물아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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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순한 의도남의 일기 스물아홉 2021. 6. 13. 02:45
김성수는 노란 피가 될 준비를 마쳤다. 카카오에서는 재택근무를 위한 맥북과 라이언 등의 굿즈를 보내 올 예정이라고 했다. 캐릭터에 전혀 감흥이 없는 나로서는 당근마켓에 팔 생각만 했다. 연애 8년, 그중 동거 2년. 결혼과 아이 생각이 전혀 없던 나는 오늘 김성수의 연봉과 회사 복지를 보게 되었다. 배우자에 대한 복지를 보고는 모니터에서 고개를 돌려 김성수에게 말했다. "오빠, 혼인신고 하자." 순간 성수의 코에서는 화산이 폭발할 때의 김이 나온 듯했다. 소리가 방구소리보다 더 컸다. "의도가 불순해서 못 해주겠다." 서로 크게 한번 웃었다. 나보고 자꾸 시꺼멓다고 했다. 사실 안정감을 많이 느꼈다. 내가 조금 지치더라도 편히 쉴 수 있겠구나, 하는 안일한 생각... 의도가 불순하다는 말에 아주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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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 전화남의 일기 스물아홉 2021. 6. 8. 16:17
화목한 가족과 거리가 먼 우리 구성원은 연락을 그리 하진 않는다. 각개전투로 잘 살자가 우리 집의 암묵적인 가훈이기도 하다. 그래도 나이가 들어가는지 가끔 맥주 한잔을 하다가 엄마는 열폭과 함께 나에게 전화를 하곤 한다. "딸랑구~ 우리 딸은 왜 이렇게 전화를 안 할까아?!" ok. 필요한 건 전화군. 그래서 퇴근 후, 주말, 심심할 때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뗄렐렐레. "유리야, 끊어! 좀 있다가 전화할게!" "어어~~" 그리고 엄마는 전화를 안 한다. 심지어 그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뭐야? 그렇게 많이 바쁜가? 잠들기 전에도 바빠?' 괜한 심술과 걱정이 함께 들어 며칠 후 나는 또 전화를 걸었다. "엄마~" "어어~(귀찮다는 듯이) 유리야." "뭐야, 바빠?" "어, 엄마 필드 나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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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 집착남의 일기 스물아홉 2021. 6. 6. 12:49
마음이 안 좋을 땐 청소를 한다. 아주 오래된 나의 습관이다. 하루 종일 영상만 봤을 때, 누굴 안 만났을 때 대체적으로 하루를 지루하게 보냈을 때 반성하듯 우울감이 온다. 약간의 강박이 있는 나로서는 청소는 아주 괜찮은 방법이다. 공부 못하는 아이가 책상 정리에만 반나절을 버리듯 게으른 나는 할 일을 버리고 청소에만 매진한다. 그리고 잘 시간이 됐으니 오늘은 이만 하고 내일부터 다시 정신차리자 하고 잠이 든다. 청소 강박의 속내는 결국 이거다. 마음에 안 들었던 오늘의 나를 빡빡 지우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 그런데 그 짧은 다짐들도 잠시 아주 문드러지게 자고 일어나면 깨끗이 치운 방에서 눈을 뜨는 사람은 하지도 않는 인스타를 잠시 염탐하고, 습관처럼 유튜브를 잠시 켜 본 다음 알고리즘이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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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 되는 것들남의 일기 스물아홉 2021. 5. 27. 18:05
1. 돈 시원한 맥주를 사 먹을 수 있다. 뜨끈한 멸치국수를 사 먹을 수 있다. 읽고 싶은 책을 다 살 수 있다. 튼튼한 러닝화를 신고 뛸 수 있다. 가볍고 시원한 속옷을 살 수 있다. 가끔 여유가 있을 땐 꽃을 살 수 있다. 먹고 싶고, 입고 싶고, 보고 싶은 것을 살 수 있으며 안전 또한 살 수 있다. 대체로 간단한 욕망들은 돈만 있으면 모조리 다 살 수 있다. 2. 동거인 굳이 부사를 넣자면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 김성수 8년간 연애를 해도 하루하루가 더 좋은, 둘이서 놀 때 가장 재미있는, 그래서 잘 맞고 그런 연애를 아직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 붙어 있을 때의 따뜻함, 잠이 절로 오는 편안함, 떨어져 있을 때의 보고픔 8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매일매일 채워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