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일기 스물여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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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비와 송이 (20.12.22)남의 일기 스물여덟 2021. 5. 13. 22:53
동생과 1년간 동시 휴학한 적이 있다. 새로운 경험을 원해서였으나 현실은 알바 인생이었다.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동생이 알바하는 가게 앞에 새끼 고양이를 누군가가 버리고 갔다. 퇴근 후 언제나처럼 맥주를 잔뜩 사서 집에 도착하니 좁은 집에 또 하나의 생명체가 입주해 있었다. 동생이 나를 쳐다보았을 때,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저 다시는 찬 비를 맞지 말라고 '우비'라고 이름 지어 주었다.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비를 작은 상자 속에서 버티고 있던 우비는 우리에게 와 가족이 되었다. 휴학을 마치고는 아빠가 마당에서 재밌게 키웠는데, 고양이의 본성이 사실 야생이라는 것을 이때 깨달았다. 집에서만 키웠던 쫄보 우비는 어느새 나무를 거뜬히 타고 동네 닭들과 숨바꼭질을 하며 노는 야생고양이가 되었다.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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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 땅 (20.12.19)남의 일기 스물여덟 2021. 5. 13. 13:55
황무지 땅을 본 적이 있는가. 누구의 소유도 아닌 땅은 그 땅을 먼저 사용한 자에게 소유권이 생긴다. 바로 이런 황무지를 아빠가 발견했고, 그 즉시 아주 아주 깊은 땅을 팠다. 우리집은 다 아빠 손이 닿아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하수도 아빠가 연결했다. 이 지하수를 기어코 또 황무지까지 연결해 물을 채웠다. 뭘 했을까. 진흙을 조성해 연꽃을 심었다...(모네도 아니고...). 우리집 마당엔 백 종류도 넘는 식물이 심어져 있는데, 심지어 바나나 나무도 있다. 가끔 해외에 다녀올 땐 아저씨 양말에 외국 씨앗을 숨겨 오기도 한다(문익점도 아니고...). 절대 돈이 목적은 아니다. 그저 호기심 때문에 마당에 한번 심어 보는 것이다. 우리나라 기후에서도 자랄 수 있는지 보려고. 바보같은 내가 바나나가 열리냐고 묻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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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20.12.18)남의 일기 스물여덟 2021. 5. 13. 13:40
나는 차에 치이더라도 길가의 비둘기를 먼저 피하고 보는 사람이다. 이것도 아빠 때문이다. 가장 귀여운 기억은 엄마랑 돌 위에 앉아서 쉬고 있는데, 아빠가 손 뒤에 무언가를 감춘 채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엄마가 경계를 하기 시작했지만 아빠가 배실배실 다가오길래 나도 따라서 배실배실 웃고 있었다. 아빠가 천천히 등 뒤에 감췄던 두 손을 펼치자마자 아주 작은 참새 한 마리가 내 이마로 튀어 올랐다. 이때 내 목소리가 나가지 않았던 건 천운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빠의 취미 중 아직까지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사냥이다. 아빠는 사냥 면허증을 가지고 있는데, 이 총은 경찰서에 가서 받을 수 있으며 사용 후에는 반드시 반납해야 한다. 나도 자세히 찾아보지 않았지만 생태계 유지를 위해 국가에서 사냥 허가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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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돼지 (20.12.17)남의 일기 스물여덟 2021. 5. 13. 11:56
아빠는 절대 강요하지는 않지만 가족끼리도 돈으로 고용할 수는 있다. 용돈이 필요할 때 병욱이는 종종 아빠를 따라나서곤 했다. 동생과 나는 잘 가꾸어진 산림을 가도 별 감흥을 받지 못한다. 쌩 산에 있어 본 우리는 인공적으로 가꾼 풍경이 그렇게 웅장해 보이지 않았다. 산에서 병욱이는 많은 경험을 했다. 잣나무에 올라타 떨어져 죽기 전에 잣을 털어 내려왔고, 아빠가 잠시 한 트럭 집에 옮기러 갈 땐 언제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멧돼지를 경계하며 혼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창 잣을 딸 땐 아빠와 병욱이 둘 다 엄청 지쳤었나 보다. 차 안에 우유도 없이 빵 하나가 있었는데 병욱이가 그 빵을 먹는 모습이란 오로지 살기 위해 먹겠다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우리 집은 전부 아빠가 만들었고 나무 보일러를 땐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