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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 전화남의 일기 스물아홉 2021. 6. 8. 16:17
화목한 가족과 거리가 먼 우리 구성원은 연락을 그리 하진 않는다.
각개전투로 잘 살자가 우리 집의 암묵적인 가훈이기도 하다.
그래도 나이가 들어가는지 가끔 맥주 한잔을 하다가 엄마는 열폭과 함께 나에게 전화를 하곤 한다.
"딸랑구~ 우리 딸은 왜 이렇게 전화를 안 할까아?!"
ok. 필요한 건 전화군.
그래서 퇴근 후, 주말, 심심할 때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뗄렐렐레.
"유리야, 끊어! 좀 있다가 전화할게!"
"어어~~"
그리고 엄마는 전화를 안 한다.
심지어 그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뭐야? 그렇게 많이 바쁜가? 잠들기 전에도 바빠?'
괜한 심술과 걱정이 함께 들어 며칠 후 나는 또 전화를 걸었다.
"엄마~"
"어어~(귀찮다는 듯이) 유리야."
"뭐야, 바빠?"
"어, 엄마 필드 나왔어."
"아~ 재밌어?"
"어~~ 유리야 끊어!"
하고 다시 전화가 오지 않는다.
이렇게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면서 전화를 왜 하라고 했는지(열폭은 왜 냈는지) 궁금할 때가 많지만, 나도 그동안 귀찮아서 연락을 안 했던 전과가 있으니 퉁치기로 한다.
얼마 전 친한 친구의 결혼식이 시골에 있어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결혼식 가. xx 알지?"
"응. 알지~ 엄마는 가게 때문에 바빠서 아빠가 대신 갈 거야. 와서 집 들러야지! 그냥 갈래?!"
"아니~ 나도 들리면 좋지. 근데 다음 날이 월요일이라, 그날 올라오긴 해야 해."
"대전까지 엄마가 태워다 줘도 되니까 집 들렀다 가아~~ 기왕 왔는데 밥이라도 먹고 얘기 좀 하다 가면 좋지."
"응. 알았어. 가서 바로 연락할게. 혹시 모르니까 아빠한테 나도 결혼식 간다고 말 좀 해 줘. 또 나 안 보고 그냥 갈라."
결혼식 당일, 딸이 오는 날이라 설레었는지 아침부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유리야, 출발했어?"
"어~ 나 이제 은행 들렸다가 출발하려고. 이따가 아빠 차 타고 가던지, 바쁘면 엄마가 태우러 와."
"어떡하지? 엄마 점심 때 골프 약속 있는데."
"... 뭐야? 그럼 나 오라고는 왜 했어? 나랑 놀 시간도 없네."
"그러니까... 집에 왔는데 얼굴 못 보고 가는 것도 좀 그렇네."
"... 그럼 골프 약속을 미뤄."
"안 돼~ 어떡하지..."
"됐어...^^ 그냥 바로 집 올게."
"결혼식장 가서 아빠한테 꼭 연락해! 가서 얼굴 봐. 아빠한텐 말해놨어."
"응. 근데 엄마 나 오라고는 왜 했어?ㅋ"
"ㅋㅋㅋㅋㅋㅋㅋ..."
뜨거운 날씨. 식장에 도착을 했고 아빠가 먼저 연락할 일은 죽어도 없으니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내가 먼저 카톡을 했다.
나: 아빠~ 어디세요~~
바로 읽었다. 아빠는 폰을 꽤 자주 만지신다. 읽씹이었다.
'.......'
전화를 걸었다. 원 썸머 나잇~~ 더 스탈 웨 샤이닝 부라잇~~~(10년째 같은 컬러링)
"어~~"
"아빠~"
"어어~~~"
"저 xx 결혼식장인데, 아빠 안 보이네요. 어디세요?"
"아~ 나 옆동네 놀러 왔어. 축의금만 따로 보냈어."
"아~~ 엄마가 바빠서 아빠가 대신 올 거라고 하던데요."
"어어~~~ 안 갔어~~"
"... 네..., 아빠! 저 그럼 바로 여기서 서울 올라가요~"
"어어~~그랴그랴~~!"
"...... 네~~ 여름에 다시 올게요~~"
"그랴~그랴아~~"
이럴 거면 아빠는 또 왜 술을 자시고 '우리 아들 딸은 연락을 잘 안 한다'라는 말을 했던 건지 난 또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갱년기라고 봐주려고 해도 다들 너무한 거 아니야...?
하나 둘 친구들을 데리러 온 아버님 어머님께 허리 숙여 인사를 했고,
나는 무주버스터미널에서 혼자 쓸쓸히 버스에 올라탔다.
제일 앞자리에 앉아 멀미할까봐 출발 전에 멜론 리스트를 정리하려고 했다.
비밀번호를 다시 입력하라기에 공용으로 쓰고 있는 동생놈에게 물어보려고 카톡을 켰다.
(2021년 5월 20일 목요일)
나: (라이언이 만원 짜리를 던지는 이모티콘과 함께) 100,000원을 받으세요.
동생: (100,000원 받기 완료!) 땡큐
... 위로 드래그해 보았다. 문장이 거의 없었다.
나: (라이언이 만원 짜리를 던지는 이모티콘과 함께) 100,000원을 받으세요.
동생: (100,000원 받기 완료!) (멘트 없음)
나: (라이언이 만원 짜리를 던지는 이모티콘과 함께) 50,000원을 받으세요.
나: 더우니까 하이네켄 사 먹어.
동생: (50,000원 받기 완료!) 땡큐
나: (라이언이 만원 짜리를 던지는...) 300,000원을 받으세요.
나: 생일이니까 가방이라도 하나 사!
동생: (300,000원 받기 완료!) 땡큐
나: (라이언...) 50,000원을 받으세요.
동생: (50,000원 받기 완료!) 멘트 없거나 or 땡큐
땡큐 머신에게 비밀번호를 물어보려다가 그냥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