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일기 서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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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남의 일기 서른 2022. 3. 5. 18:10
퇴사하고 싶었다. 원작이 있는 스토리를 각색해서, 청소년 타깃의 추리소설을 편집하던 중이었다. 글을 잘 쓰는 작가들은 각색하는 걸 꺼리기 때문에, 대체로 초보 작가들에게 글을 의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부분 초보 작가들은 자신의 이름을 내걸기보단 필명을 더 많이 쓴다. 당당히 이름을 내걸기엔 부족함을 잘 아는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이해했다. 진짜 작가들은 자신의 글을 쓰고 싶어 할 테니까. 게다가 원작이 있는 경우, 원작사의 까다로운 조건들을 모두 수용해 줘야만 한다. 기껏 창의력을 발휘해 작가가 각색해 놓으면 원작사에서는 NG, 수정, NG, 수정... 문젠 내가 이 책만 담당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편집부 모두가 바쁜 스케줄을 소화해 낸다. 진짜로 문제는 길을 잘 안내해 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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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남의 일기 서른 2022. 2. 12. 21:44
모든 연인이 다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김성수와 나는 대체로 아무말을 한다. 근데 그 아무말이 그렇게 재밌다. 별 의미도 없는데 하하호호 참 웃기다. 가끔 진지한 얘기로 서로의 고민을 들어주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주기도 하지만 우리 대화의 80퍼센트는 정말 아무말이다. 아무말이 도를 지나쳐 이미 한국말이 아니게 될 즈음, 입이 귀에 걸려 있는 김성수를 향해 물었다. "왜 우린 이런 말들이 재밌을까?" 아주 잠깐 고민하던 성수가 말했다. "글쎄,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을 만들어서 해야만 하니까?" 옳다구나 싶었다. 나는 김성수에겐 나의 있는 그대로의 생각과 감정들을 100퍼센트 그냥 던진다. 필터가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가끔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김성수에게 말을 건네며 들여다볼 때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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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남의 일기 서른 2022. 1. 27. 20:22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설 지나고 아빠 생일이야~ 근데 그게 환갑이야." 벌써 환갑이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언제 그렇게 나이를 드셨는지, 새삼 나만 나이를 먹는 게 아닌데 말이다. 뭘 할까 하다가, 가족여행을 간 적이 없어 제주도에 가자고 했다. 엄마도 그게 좋겠다고 했다. 우리 가족은 '각자가 잘 살자'라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어 각자 알아서 여행을 잘 다녔다. 한 번쯤은 가족여행을 가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부랴부랴 2주를 앞두고 비행기표를 끊었다. 아주아주 비쌌고, 결제 메시지는 내 잔고가 위험하다는 신호를 계속해서 보내왔다. 명절마다 용돈을 챙겨드리긴 했지만, 무려 환갑이었다. 뭔가 남달라야 할 터였다. 동생과 함께 모으면 큰 액수를 만드는 게 쉽겠지만 아직 그 역할은 나만 해야 했다.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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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남의 일기 서른 2022. 1. 27. 19:43
얼마 전에 넷플릭스에서 '돈룩업'을 봤다. 완전히 스포하자면 두 번째 쿠키 영상에서 메릴 스트립이 죽는다. 어떻게 죽냐면 다른 행성의 이상한 동물에게 잡아 먹혀 죽는다. 아주아주 잔인하게. 여기서 다른 행성이라는 것을 추가로 설명해야겠다. 부자들은 멸망하는 지구를 탈출해 냉동모드에 들어갔다. 우주선을 타고 몇백 년 후에 공기가 있는 곳으로 자동 안착했는데, 그곳은 마치 공룡이 살던 중생대와 같았다. 단꿈에서 깨어나듯 메릴 스트립은 우주선에서 내려 기지개를 쭉 켰다. 태초의 이브처럼 완전한 알몸이었다. 어느새 미니 사이즈의 공룡 같은 녀석이 다가와 메릴 스트립을 한입에 잡아먹었다. 나는 이 장면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다.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들이 정복을 시작하고부터 세상은 살기 좋다고 말하게 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