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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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남의 일기 서른둘 2024. 11. 28. 13:58
나는 언제고 깨끗한 새 시작을 다짐하곤 했다.마치 지난 시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인생에 조금도 필요하지 않은 어설픈 완벽주의가 도진 것일 수도 있다.이것이 나쁜 습관인 건 잘 안다.지금의 나를 만든 건 지나간 시간들이다. 완벽한 새시작은 있을 수도 없고, 한심하게 나를 부정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첫눈은 항상 연말과 연초 사이에 온다.올해의 사건들 위에, 내년을 위한 새하얀 도화지 한 장을 넘겨주듯 온다.이것이 다시 새 그림을 그리자는 설렘을 안겨주곤 한다.분명 완벽을 생각했을 때에만 완성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완성된 것들 중 과연 완벽을 자부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결국 부족한 완벽이더라도 작은 완성들을 여러 번 짓는 게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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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남의 일기 서른둘 2024. 10. 24. 11:07
맥주 한 컵 가득 원샷을 때리며 엄마가 말했다. "나는 유리가 정말 이상한 사람을 데려오면 어쩌나 걱정했어. 얘가 어떨 땐 좀 특이한 구석이 있어서 그때의 지같은 사람 데리고 올까봐. 그러면 정말 큰일인데, 우리 성수같은 사람이 와서 정말 얼마나 넘치게 행복한지 몰라."벌써 아흔아홉번째 고백이었다. 사랑해 마지않는 사위를 향한.함박웃음을 지으며 아빠는 오늘을 최고로 잘 끝냈다는 자축의 소주병을 기울였다. 오늘의 일은 피로연, 무주 마을 잔치였다. 흐르는 투명 액체를 받으며 나는 생각했다. '그래, 이러려고 내가 결혼식을 올릴 다짐을 했겠지.'우리 둘은 벌써 재작년부터 부부다. 혼인신고를 하긴 했지만 피곤한 결혼식을 올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걸리는 게 있었다. 그동안 부모님들이 뿌리신 돈. 속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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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 가능남의 일기 서른둘 2024. 4. 1. 23:28
TV에서 부부란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어주는 것이란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최근에 나는 이 말에 크게 공감하는 사건이 있었다. 평소에 아끼던 유리잔이 있었는데, 실수로 떨어뜨릴 뻔한 걸 간신히 잡아냈다. 순간 심장이 덜컥했다. 그리고 스치듯, 이런 심장의 두근거림이 뇌에서 내린 지시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평소에 심장은 편안하게 숨을 쉰다. 그런데 뇌가 예측했던 것에서 크게 빗나가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심장은 덜컹이게 된다. 평소의 안정감에서 벗어나 우리의 몸이 딸국질을 하듯 탈이 나는 것이다. 이처럼 뇌는 예측 가능한 상황에서 심장이 안정적으로 뛴다. 컵이 깨질 것이란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건강한 부부의 관계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예측 가능한 사람으로서 안정감을 주는 것. 상대방의 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