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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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좌왕남의 일기 서른둘 2024. 12. 23. 23:41
나의 부족한 모습과 밑바닥을 가장 많이 캐치하는 건 아마 남편일 것이다.나는 나의 그런 모습을 애써 감추려고 오히려 그를 나무랄 데가 있다.예민하지 않은 그는 나의 공격에 의문을 품기보다는 자기를 탓하거나 답답해하곤 한다.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나쁘고 그가 착하다.나의 못난 모습은 내가 아닌 모습을 나와 동일시할 때 나타나기 시작한다.나는 어설프게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완벽하길 바란다.이미 이 자체로 나는 틀렸다. 모든 상황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나는 없기 때문이다.그런데 그 완벽을 어떻게든 메꾸기 위해 남편을 끌어들인다. 머릿속으로 내 역할과 남편의 역할을 나눠서 그에게 시키기 시작한다.이미 자기 그 자체로 있는 성수는 집중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나의 어설픈 완벽주의가 어설픈 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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휨남의 일기 서른둘 2024. 12. 15. 08:41
내가 키우는 식물 드라코와 콤팩타는 쌍둥이처럼 둘 다 한쪽으로 휘어서 자란다.일자로 반듯하게 자라면 좋겠지만, 이미 기울어진 줄기를 바로잡을 방법은 없다.곧으면 부러진다고, 상황에 따라 휠 줄도 알아야 하는 게 유도리이긴 하지만이번에 이사를 하면서 뿌리채 뽑히지는 않을까 아주 조마조마했었다.이 녀석들도 휘고 싶어서 휜 것은 아니다.햇볕을 받아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 생존을 위한 전략으로 안간힘을 내어 고개를 돌렸을 것이다.모든 생명체는 환경에 맞춰 진화하듯이 무한 변신의 과정을 거친다.당장 우리들의 사회생활에서도 상사의 말에 비위를 맞출 줄 알아야 오늘의 내가 안전할 수 있다. 물론 그 대가로, 굽은 허리와 안타까운 거북목이 만들어지기도 한다.드라코와 콤팩타와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더 허리가 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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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어 반복남의 일기 서른둘 2024. 12. 11. 19:57
글을 쓰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할 때가 있다. 그렇게 죽 다 쓰고 읽어보면 내용이 굉장히 지루하다. 같은 말을 두 번하면 잔소리가 되듯, 눈으로 읽는 글에서도 듣기 싫은 소리가 돼버린다.반복되는 일상 또한 지루함을 선물한다. 경험의 범위만큼 언어도 축적되는 것이라 내가 매일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면, 항상 똑같은 말을 내뱉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반면에 시는 평범한 일상도 다양하고 풍성하게 포착한다. 사회적으로 합의된 개념을 내 맘대로 요리해 사물의 본질을 엿볼 수 있다.무미건조한 사전적 정의 대신에 자신만의 언어로 조합해 다르게 표현해 보는 방식. 내가 매일 일기를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를 쓸 때 적용되는 시선들을 연습하기 위해.비슷한 하루를 살아가더라도 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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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남의 일기 서른둘 2024. 12. 8. 18:55
엄마와 딸은 이상한 관계다.가장 애착이 깊고 편안하지만 동시에 가장 상처를 주기 쉬운 상대이기도 하다.딸은 엄마의 배 속에서 나왔다. 같은 성별이기도 하다. 그래서 엄마는 딸과 자신을 쉽게 동일시한다.속상한 일이 생겼을 때, 그 마음을 확실히 나눠가질 수 있는 상대는 딸밖에 없다. 자신이 느꼈던 불안만큼, 딱 그만큼의 무게로 옮겨서 짓누를 수 있는 상대는 딸뿐이다.심리적 거리가 먼 사람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끝까지 전달할 수 없다. 대신에 나와 똑같기 때문에, 나에게서 절대로 도망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묶어놓고 자신의 상처를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는 상대는 딸뿐이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다. 무의식 중에 그것이 가능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수 있는 상대를 찾은 것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