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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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이런 책은 없었다! (20.05.18)남의 일기 스물여덟 2021. 5. 1. 15:26
꽤 신경을 썼던 책이 출간됐고, 바빴고, 기분이 째졌다.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서 여유 있게 피자에 혼맥 한 잔 하고 싶었으나, 사회생활은 날 가만두지 않았다. 저자가 사주는 밥을 먹기 위해 생전 처음 들어보는 호텔에서 팀장님과 셋이 뷔페를 먹기로 했다. 말만 들어도 웃기고 귀찮았다... 인쇄가 들어가고, 예약 판매를 할 수 있는 시기가 되면 인터넷 서점에 '서지정보'를 작성해서 발송한다. 서지정보는 책 소개나 홍보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막판에 나는 정신줄을 놓으면서 출판사 서평에 이런 문구를 썼다. "지금까지 이런 책은 없었다. 이것은 ○○○인가, ○○○인가!" 이미 한참 지난 유행어를... 그것도 진지하디 진지한 서지정보에. 팀장님께 보여 드렸더니 세상에 OK를 했다. 다만 "ㅋㅋㅋㅋ"를 덧붙였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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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사자, 어린아이 (20.05.06)남의 일기 스물여덟 2021. 5. 1. 14:03
니체가 말한 인간 정신의 3단계는 다음과 같다. 낙타-사자-어린아이: 낙타는 등에 짐을 지고 사막을 걷는다. 우리도 짐을 진다. 나를 안전하게 보호해 준 부모에게 빚을 갚기 위해 짐을 지고 아이를 키우기 위해 가장의 짐을 지고 내던져진 시스템에 맞춰야 해서 짐을 진다. 그렇다고 계속 힘겨울 수만은 없다. 주어지는 대로 사는 듯하고, 몸과 마음이 무겁다면 꼭 고민해 봐야 하는 단계이다. 니체가 가장 낮은 단계의 의미로만 낙타를 말한 것은 아니다. 한 번쯤은 겪어 봐야 하는 단계 노동의 수고로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한 배려 등은 꼭 한 번 제대로 경험해야 한다. 다음 단계는 사자이다. 주어진 질서를 부정해보고 당당히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한다. 하지만 왠지 외로워 보인다. 자유의 이면에는 책임이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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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20.05.03)남의 일기 스물여덟 2021. 4. 30. 23:08
가구는 꼭 완제품으로 사야 한다. 프레임, 테이블, 수납장, 협탁까지 지문이 다 사라졌다. 하루에 나사를 아흔 개씩 조여댔다. 좁은 집에서도 작업실은 필요해서 굳이 자리를 내었다. 그런데 오늘, 진짜로 일을 한다. 그동안 나만 급박했던 출간일을 갑자기 저자가 걱정하기 시작했다. 머리말과 표지 문구 아이디어를 보내왔다. 퇴근 후나 주말은 다 무시하는 편인데 휴무가 길어 마음이 조급하다. 아직 인터넷이 없어 외딴섬처럼 살고 있다. 나는 1.2기가를 쓰기 때문에 영상통화 하나면 데이터가 다 날아간다. 온몸에 근육통이 왔다. 설명서는 이제 꼴도 보기 싫다. 난독증이 있다고 아무리 어필해 봐도 김성수는 봐주지 않는다. 머리도 쓰기 싫고, 몸도 쓰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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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과 거울 (20.04.19)남의 일기 스물여덟 2021. 4. 30. 22:46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았다. 아이는 신기해하기보다 처음엔 어리둥절해한다. 거울 속에 비친 것이 바로 자기인지는 모른다. 그런데 이건 꽤 충격적인 사건이다. 자기의 이미지를 처음 발견하게 된다. 이런 나를 바라보는 타자라는 존재도 이때 생겨난다. 문제는 이 거울 속에 비친 이미지로는 진짜 나를 다 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우리 인생의 분열은 시작된다. 말로도 다 담지 못하고 표현할 수도 없는 그저 타인에게 비치는 이미지의 나 설명도 안 되고 환장할 노릇이다. 이 분열의 다른 버전은 인스타다. 조금 다른 의미로 분열된다. 거울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비추지 못했다면, 인스타는 거짓말하려는 나의 이미지를 다 담지 못한다. 과장해서 포장하려고 하는데, 그 욕망이 쉽게 채워지진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