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일기 서른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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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년 95세남의 일기 서른하나 2023. 10. 26. 11:10
초등학교 때까지 나와 남동생은 할머니와 같이 한 방에서 잤다. 이불을 정갈하게 깔고, 그 위에 큰 이불 한 개를 덮었다. 나는 항상 가운데 자리였다. 그래서 더울 때나 추울 때 나만 조금 곤란했다. 할머니는 교회를 다녔다. 시골 어르신들은 대체로 교회를 다닌다. 하느님을 믿기도 하지만, 본인들의 마지막을 케어해 줄 하나의 수단이 되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족이 없는 어르신들은 모두 교회를 다닌다고 엄마가 말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어렸을 때 엄마와 아빠는 늘 바빴다. 그 빈자리를 채워준 건 우리 할머니였다. 셋이 저녁을 먹고, 잠들기 전 나란히 엎드려 턱을 괴고 할머니가 펼친 성경책을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노래를 무척 잘 불렀다. 목소리는 가늘었지만, 정확한 음정과 가성이 특히 아름다우셨다. 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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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선택남의 일기 서른하나 2023. 10. 24. 05:46
띠딩- 버스 안에 똑같은 알람 소리가 울린다. 다 같이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본다. 모두에게 동일하게 날라 온 경고 문자다. 모두가 똑같이 위화감을 느낀다. 혹은 다 같이 귀찮음을 느낀다. 너무 잦은 문자로 인해 이제는 내용과는 상관없이 피로감만 쌓여가는 것이다. 뭐가 되었든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동일한 감정을 심어 줄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 있다는 게, 나에겐 왜 갑자기 무서움으로 다가왔을까. 나는 똑같은 감정을 권유하는 것들에는 일단 경계심을 갖고 보는 편이다. 가끔 난 종교에 회의적일 때가 있다. 무턱대고 모든 게 하나님의 뜻대로 다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볼 때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분명 이 사람의 마음이 약해졌을 때, 이성적인 사고가 고장이 났을 때, 모든 걸 놓고 의지만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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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섦남의 일기 서른하나 2023. 10. 21. 04:12
웃긴 얘기지만, 1인 출판이 붐일 때 나도 출판사 신고를 해 본 적이 있다. 등록은 아주 간단했다. 10분 만에 끝이 나더라. 취미로 해 보겠다던 출판일은 한 권을 내더라도 천만 원단위가 깨지는 일이었고, 안타깝게도 나는 이 사실을 신고 후에야 제대로 알게 된다. 어렴풋하게 종이값, 제본값, 원고료, 디자인료 등은 알고 있었지만, 나는 열정가이도, 부잣집 딸도, 모아 둔 돈도 한 푼 없는 처량한 신세였기에 깔끔하게 문을 닫고 동종 업계로 이직을 한다. 사실 능력 부족이 가장 컸다.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어쨌든, 이때 내가 용감하게 지었던 출판사명은 ‘낯섦’이었다. 지금 이 일기장의 사이트 이름이기도 하다. unfamiliarbook. 작명의 이유는 간단하다. 나에게 책은 낯섦 그 자체였기 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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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부터 잘살자남의 일기 서른하나 2023. 10. 20. 09:04
서울에 살면서 가장 많이 느끼는 점은, 힘든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물론 시골이라고 다를 바는 있겠냐만, 내 말의 요는 정신적인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 똑같이 힘들어도 시골에는 힘듦 속에 재미는 있다. 밭일이든 품앗이든 이웃을 만나서 술 한잔 걸치는 것이든, 만날 사람도 많고 할 일도 많아 우울증에 걸릴 물리적 시간이(?) 부족하다. 나름 시골 출신인 내가 우리 부모님한테서 얻어 낸 정보를 토대로 내리는 결론이다. "요새 중장년층 우울증이 많대. 그런데 엄마 아빠는 너무 바빠서 우울증 걸릴 틈도 없을 것 같아." 그 둘은 크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 말이 딱 맞아, 당장 내일 마당이라도 쓸어야 해. 서로서로 품앗이하는 행사도 얼마나 많은데. 당장 내일도 옆집 아저씨 결혼식 잔치 때문에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