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까지 나와 남동생은 할머니와 같이 한 방에서 잤다.
이불을 정갈하게 깔고, 그 위에 큰 이불 한 개를 덮었다.
나는 항상 가운데 자리였다. 그래서 더울 때나 추울 때 나만 조금 곤란했다.
할머니는 교회를 다녔다. 시골 어르신들은 대체로 교회를 다닌다.
하느님을 믿기도 하지만, 본인들의 마지막을 케어해 줄 하나의 수단이 되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족이 없는 어르신들은 모두 교회를 다닌다고 엄마가 말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어렸을 때 엄마와 아빠는 늘 바빴다.
그 빈자리를 채워준 건 우리 할머니였다.
셋이 저녁을 먹고, 잠들기 전 나란히 엎드려 턱을 괴고 할머니가 펼친 성경책을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노래를 무척 잘 불렀다. 목소리는 가늘었지만, 정확한 음정과 가성이 특히 아름다우셨다.
거의 매일 밤 나와 동생은 할머니가 부르는 찬송가를 따라 불렀다.
할머니는 옛날이야기도 많이 해 주셨다.
우리 할머니 이름은 최 봉자 임자신데, 원래 이름은 최 선자 녀자셨다고 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름을 바꿔치기했다. 그래서 본인의 이름이 바뀌었다.
옛날에는 그런 일도 일어나는구나, 하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평생을 바꿔치기당한 이름으로 사셨지만, 할머니는 원래의 이름만큼이나 정말로 선녀 같았다.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그렇게 나와 동생 칭찬을 했다.
할머니의 작은 노란색 수첩에는 육 남매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삐뚤빼뚤하게 적혀 있었는데,
나는 매일 밤 커다란 버튼식 전화기에 번갈아가며 숫자를 눌러드렸다.
멀리 사는 자신의 딸아들과 조근조근 통화를 나누실 때마다 나는 왠지 뿌듯하고 기분 좋았다.
할머니는 칠 남매 중에 넷째인 우리 아빠와 엄마가 모셨다.
그래서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매일같이 할머니의 얼굴을 봤다.
대학교에 다니고 나서부터는 가끔씩 할머니를 봤다.
그렇게 오랜만에 봤던 할머니가 머리를 감으시다가 나를 불러서는, 치약을 건네면서 이게 샴푸인지를 물었다.
이건 이를 닦을 때 쓰는 치약이라고 알려주고, 샴푸를 할머니의 손에 짜 주었다.
그리고 돌아서려는 순간, 치약을 다시 듬뿍 짜서 본인의 머리에 문지르는 할머니를 보곤 곧장 엄마에게 뛰어갔다.
할머니는 점심을 먹고, 또다시 점심을 먹었다.
밥을 먹고 또 먹고 또 먹었을 때쯤 먹었던 음식들을 전부 토해냈다.
그렇게 할머니에게도 치매가 찾아왔고, 요양보호를 위해 고모들 넷이 사는 일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오육 년 가까이 할머니는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셨다.
가장 마지막까지 기억해 냈던 건 칠 남매 중에서도 우리 아빠의 이름 이길재와, 자기의 고향이던 무주, 단 두 가지뿐이었다.
무주에서부터 자신이 평생 시집살이를 했던 안성면까지 걸어서 몇 시간이 걸렸는지만 정확하게 기억하셨다.
할머니가 아무것도 기억해 내지 못한다는 것을 핑계로, 나는 할머니의 얼굴을 보러 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 전, 할머니는 95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장례식장에 들어섰을 때 아주 낯익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내가 할머니한테 연신 예쁘다고 말했던 바로 그 사진, 동그란 안경을 쓰고 환하게 웃음 짓고 있는 선녀 같은 할머니가 있었다.
남편은 나에게 할머니를 닮았다고 말했다.
진작 소개시켜드리지 못한 걸 후회한다.
국화를 놓아드리고, 절을 하고, 오랜만에 친척들의 얼굴을 보면서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냥 밥과 국을 먹고 있는데, 막내고모가 조용히 와 나에게 얘길 했다.
매일 밤 전화할 때마다 할머니가 나와 병욱이 얘기를 신나서 했다고.
애들이 너무 착하다고 항상 말했다고.
갑자기 눈물이 툭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