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태풍주의보 속 백패킹 (20.08.05)남의 일기 스물여덟 2021. 5. 1. 23:21
배 안은 평화로웠다. 우린 덕적도로 가는 길이었다. 나는 맥주 한 캔을 사고, 오징어 굽는 냄새가 미쳤다는 생각에 마른오징어도 한 마리 샀다. 맥주부터 클립을 뒤로 젖히고, 안주를 성수에게 건넸다. 곰곰이 오징어를 들고 있던 성수는 매점으로 향했다. 손에 들고 온 것은 과자 박스를 찢은 한 단면이었다. 바닥에 뭘 흘리기 싫어하는 성격이다. 나는 맥주 한 모금을 먼저 털어 넣었고, 내 무릎을 베고 누워 성수는 구운 오징어를 짝짝 찢기 시작했다. 누런 박스 위에 쌓여가는 안주를 하나 집어들었는데, 오징어가 마치 실같이 얇았다. "왜 이렇게 얇게 찢어? 혹시 심심해?" "아니, 딱딱한 거 이빨에 안 좋아." "아... 오빠도 먹어. 도착하려면 좀 멀었어." "나는 건강한 이빨로 오래 살고 싶어. 너 많이 먹어..
-
알레르기 (20.07.25)남의 일기 스물여덟 2021. 5. 1. 23:05
누구에게나 취약점이 있겠지만 나에겐 그게 알러지다. 새우는 고위험에 게는 측정범위 초과로 수치조차 알 수 없지만, 그 외에도 진드기와 먼지 등등 나를 낳아 준 엄마 말마따나 다시 태어나는 게 낫겠다 싶을 때도 있다. 배 속에 넣어주기만 한다면 싹 다 고쳐셔 다시 등장하고 싶을 정도다. 새우깡과 알새우칩에 진짜 새우가 들었을까? 궁금하면 나에게 먹여 보면 안다. 성분이 미세하게 들었고 나머진 향만 내는 구라라 해도, 나는 그 성분을 드러낼 수가 있다. 새우깡 하나에 볼에 반점이 부어올라 두 달을 창피한 적이 있었다. 가장 큰 어려움은 국물을 우려낼 때 쓰는 건새우나 게다. 김치수제비에 건새우가 몇 알 숨어 있었든, 길거리 오뎅을 먹는데 사실은 게로 우려낸 것이었든 결론적으론 온몸이 붓고 눈을 뜰 수 없어 ..
-
시골집 (20.07.14)남의 일기 스물여덟 2021. 5. 1. 22:36
나는 집이 가장 불편했다. 시골에서는 동네 사람 누구든 이 집 저 집 마루에 그냥 놀러 갈 수가 있다. 우리 집엔 마루가 있었고, 뭐든 만들어대는 아빠 덕에 공구를 빌리기 위해서도 사람들이 찾아왔다. 나에게 집은 언제든지 누구라도 불쑥 찾아올 수 있는 곳 마음 한구석에 발소리가 들릴까 매일 마음 졸이며 있는 곳 아빠를 부르든 엄마를 부르든 "유리야" 하면, 헐레벌떡 나가서 "지금 안 계신데요"라고 말해야 하는 곳이었다. 거의 매일 우리집엔 누군가가 찾아왔다. 어렸을 때부터 동네 친구보단 할아버지 할머니가 더 많았으니 쪽수(?)에 밀려 자동 어른 공경을 배운 것인지도 몰랐다. 인사예절도 제대로 받았고, 난 나름대로 예의가 발랐다. 언제나 뛰쳐나가 엄마아빠가 현재 부재중임을 즉각 전달했다. 옷도 항상 갖추어..
-
구찌 (20.07.03)남의 일기 스물여덟 2021. 5. 1. 22:14
현대 사회는 뭐니 뭐니 해도 소비 사회다. 이때 소비의 대상은 물건이 아닌 구분짓기 욕망이다. 만약 내가 구찌가방을 샀다면, 이것은 담는 용도보단 이걸 산 내 능력 과시의 기회를 산 것에 더 가깝다. 브랜드 가치에 대한 선입견이 전혀 없었다면 나의 취향 상 저렇게 화려한 벌무늬가 정말 예뻐보였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물론 예뻐보일 수도 있지만, 그리고 브랜드의 역사에 매혹되었다고 말하고도 싶을 테지만 아마 내 눈에 예뻐보인다기보다는, 이 가방을 바라 볼 타인의 시선을 더 사고 싶었을 것이다. 단순히 기능을 다했다고 물건을 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주 약간씩 업그레이드가 되더라도 보편적인 유행에 뒤쳐지고 싶지 않다는 욕망 소외되고 싶지 않고, 능력이 없어보이고 싶지 않다는 욕망 그리고 뭔가 돈이 많아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