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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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20.11.16)남의 일기 스물여덟 2021. 5. 4. 13:46
소라는 꽃을 좋아한다. 그래서 가을 국화를 여러 색으로 골랐다. 성수가 등 뒤에 숨겨서 데리러 나온 소라 앞에 짠 하고 내밀었다. 순간 "형, 아침에 부탁한 거 준비해 오셨네요."하고 정식이가 너스레를 떠니, 성수가 "그럼!"하고 받아주었다. 꽤 친해졌구나 싶었다. 서로 번호도 모르면서... 탁 트인 야외 카페에서 커피와 맥주를 마셨다. 소라는 휴대폰을 보며 주문한 고기가 아직 도착을 안 했다며 걱정을 했다. 소라는 자기 집에 우릴 초대하면서 정말 많은 준비를 했다. 내가 먼지 알러지가 있어 침구와 옷가지도 전부 빨아 놓았다. 지도 눈썹 휘날리게 바쁜 직장인이면서. 누군가에게 음식을 해 준다는 게 얼마만큼의 애정과 마음이 담긴 것인지, 셀 수 없는 종류의 것이란 걸 안다. 음식을 구상하면서 재료들을 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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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와 몸의 일치 (20.11.12)남의 일기 스물여덟 2021. 5. 4. 13:19
요즘 피아노를 배우며 느끼는 것은 이론보다 실전이 어렵다는 것. 그리고 실전보다 이론이 훨씬 마음 편하다는 것. 코드의 원리를 알고 계이름을 외울 때는 마음이 정말 편하다. 하지만 외운 계이름을 실제로 내 손으로 내려칠 때는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감각이 참 불편하다. 정확한 표현은 머리와 몸이 동시에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겠다. 대체로 꿈을 이루는 어려움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머리로는 내가 하고 싶어 그림을 그리지만, 실제와는 전혀 일치하지를 않는다는 것. 머리는 그리는데, 몸은 전혀 안 그리는 것. 아예 깊은 병이 되려면 머리로만 계속해서 그리고 몸은 전혀 안 움직이면 된다. 그래서 점점 벌어지는 그 간극 사이에 빠지면 우울함도 맞이할 수 있다. 꿈이 있는데 그 꿈이 멀게만 느껴진다면, 그건 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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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듦 (20.11.04)남의 일기 스물여덟 2021. 5. 4. 12:30
더 배우고 싶어 돈을 벌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도 돈을 버니 더 편해지고 싶어 했다. 나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돈을 벌고 나이가 드니 결혼이나 아이 생각도 문득 스쳤다. 꿈도 꾸지 말자 싶다가도 바락바락 비혼만을 고집하던 마음속에 문득 아이 생각이 스치는 걸 보면 이게 나이가 든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저 물리적으로만 드는 나이의 반증 아이에게 쓸 시간을 나에게 쓰고 싶다는 이기심이 첫 번째 이유라면, 두 번째 이유는 아이에게 상처를 줄 것이 미리 두려워서였다. 우리는 누구나 어린 시절에 나를 가장 사랑하는 부모로부터 폭력과 작은 상처들을 입는다. 크든 작든 알게 또 모르게 부모의 슬픔을 아이에게 투영한다거나 아이의 시선보다는 다른 사람이 바라볼 시선에 더 신경을 쏟는다거나 내 외로움을 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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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과의 싸움 (20.11.02)남의 일기 스물여덟 2021. 5. 2. 14:31
9월부터 내년 1월까지는 눈썹이 휘날리도록 바쁜 시기이다. 덧붙여, 우리 사장님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 시간만큼 성과물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올드)맨이다. 직원 중 퇴근 시간에 나 혼자만 칼퇴를 한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쓰는 것도 웃기지만 6시 이후로는 당연히 내 시간이니까. 만약 내가 맡은 일을 주어진 시간 안에 끝내지 못한다면, 게다가 내가 한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나도 야근을 한다. 하지만 월급을 주는 만큼 역할을 충분히 해냈을 때, 나는 뒤도 안 돌아본다. 퇴근 무렵, 사장은 또다시 회의실로 직원들을 소환했다. 다시 시작된 야근 타령. 하도 내가 칼퇴를 하니까 야근 얘기 못 들었냐면서 전체 회의를 진행한 것이다. 사실 내가 먼저 퇴근을 하면, 언니 둘도 따라서 눈치를 보다가 퇴근을 했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