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멧돼지 (20.12.17)남의 일기 스물여덟 2021. 5. 13. 11:56
아빠는 절대 강요하지는 않지만 가족끼리도 돈으로 고용할 수는 있다. 용돈이 필요할 때 병욱이는 종종 아빠를 따라나서곤 했다. 동생과 나는 잘 가꾸어진 산림을 가도 별 감흥을 받지 못한다. 쌩 산에 있어 본 우리는 인공적으로 가꾼 풍경이 그렇게 웅장해 보이지 않았다. 산에서 병욱이는 많은 경험을 했다. 잣나무에 올라타 떨어져 죽기 전에 잣을 털어 내려왔고, 아빠가 잠시 한 트럭 집에 옮기러 갈 땐 언제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멧돼지를 경계하며 혼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창 잣을 딸 땐 아빠와 병욱이 둘 다 엄청 지쳤었나 보다. 차 안에 우유도 없이 빵 하나가 있었는데 병욱이가 그 빵을 먹는 모습이란 오로지 살기 위해 먹겠다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우리 집은 전부 아빠가 만들었고 나무 보일러를 땐다. 이..
-
1종 면허 (20.12.16)남의 일기 스물여덟 2021. 5. 13. 11:22
나는 1종 면허가 있다. 19살 때 따서 벌써 갱신도 했다. 내가 트럭으로 도로주행을 했다고 그러면 사람들은 먼저 페달이 발에 닿았는지를 물어본다. 그러면 나는 반은 서서 딴 것도 같다고 대답해 주곤 한다. 어쨌든 1종을 딴 이유는 엄마 때문이었다. 하도 길이 아닌 길을 다니는 아빠 덕에 차가 진흙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럼 전화를 받기 싫어도 저녁 시간에는 데려와야 하니 긴 밧줄을 챙겨 엄마가 아빠를 구출하러 가곤 했다. 요는 그럴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만약을 대비해 나도 연습을 하라는 뜻이었다. 그 외엔 렌트할 때 수동이 필요할 때가 있을 거라고도 덧붙여 주었다. 한 번 떨어지고 두 번째에 합격을 했던 어느 날, 아빠는 나에게 차에 타라고 했다. 뭘 또 구경시켜 주려나 보다 했다. 아빠는 마을..
-
꽃씨 서리 (20.12.15)남의 일기 스물여덟 2021. 5. 13. 10:48
아직도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대학교 1학년 때, 교수님이 봉사활동으로 꽃동네에 갈 생각이 있냐 물었을 때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아마 혼자 들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황한 친구가 "정말 갈 생각이 있어?"라고 물었던 것 같은데, 그때 내 대답은 "응. 우리 동네가 꽃동네야"였다. 나는 그때 정말로 그 단어의 의미를 몰랐었다. 이유는 아빠가 꽃섬에 놀러 갔다가 우리 동네를 꽃이 피는 동네로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는 고딩 때, 아빠는 작업을 위해 나와 내 친구 둘을 고용했다. 파란 봉다리 하나씩을 주면서 한 봉다리를 채울 때마다 3만 원을 준다고 했다. 나는 아빠가 파산할까봐 진심으로 걱정이 되었고, 내 친구 둘은 한탕할 생각에 부푼 듯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 꽃씨를 따 보고는, 이 봉다리를 꽉 채..
-
고백 (20.12.13)남의 일기 스물여덟 2021. 5. 13. 10:32
고백하자면 지금까지 좋아했던 사람이 네 명 있다. 많아 보여도 서른을 바라보는 인생 중 네 명이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다. 좋아했던 이유는 하나, 그냥 계속 생각이 나니까. 웃긴 건, 그중 세 명에게는 내가 먼저 고백을 했는데 더 웃긴 건, 더 이상 생각이 안 나고 좋아하는 마음이 사그라들었을 때 말을 했다. 고백보다는 좋아했었다고 통보를 하는 수준이었다. 중고등학교 땐 정말 이해가 안 갔다. 이사람 저사람 품앗이하듯 사귀는데, 유행에 뒤쳐지는 것 같아 중3 때 세이클럽으로 고백을 받아들였다. 두 시간 정도 쪽지를 주고받다가 갑자기 '사랑해'라고 하는데,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헤어지자'고 대답했다. 전설의 LTE급 이별이었다. 친구들한테 말했더니 그냥 계속 웃어대기만 했다. 학교가 좁아서 이미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