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대학교 1학년 때, 교수님이 봉사활동으로 꽃동네에 갈 생각이 있냐 물었을 때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아마 혼자 들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황한 친구가 "정말 갈 생각이 있어?"라고 물었던 것 같은데,
그때 내 대답은 "응. 우리 동네가 꽃동네야"였다.
나는 그때 정말로 그 단어의 의미를 몰랐었다.
이유는 아빠가 꽃섬에 놀러 갔다가 우리 동네를 꽃이 피는 동네로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는 고딩 때, 아빠는 작업을 위해 나와 내 친구 둘을 고용했다.
파란 봉다리 하나씩을 주면서 한 봉다리를 채울 때마다 3만 원을 준다고 했다.
나는 아빠가 파산할까봐 진심으로 걱정이 되었고, 내 친구 둘은 한탕할 생각에 부푼 듯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 꽃씨를 따 보고는, 이 봉다리를 꽉 채우려면 10년은 족히 걸리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꽃씨의 출처는 길가에 핀 꽃이었다.
참고로 우리 아빤 차에 앉기도 전에 출발하는 버릇이 있는데, 이걸 내 친구들에게 미처 알리지 못했다.
다른 꽃씨를 찾아 이동할 때마다 유나와 희정이가 뒤로 나자빠졌다.
문제는 꽃 씨앗을 다른 동네에서 서리할 때도 있었는데 마을 사람 누군가가 신고를 했는지,
경찰 아저씨가 오셔서 아빠와 긴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하긴, 거긴 들판에 핀 꽃이라기엔 너무 정돈이 잘돼 있었고 종류도 각양각색이었다.
유나와 내가 한참 쫄고 있을 때, 계속 손을 멈추지 않았던 희정이가 우리를 나무랐다.
"야! 아버지가 시간 벌고 계시잖아. 얼른 주워 담아!"
난 그때만큼은 정말로 희정이가 우리 아빠 딸인 줄 알았다.
유나는 눈치보며 씨앗을 긁다가는 뿌리째 뽑아 봉다리에 넣기도 했다.
이때 많이 배웠다.
코스모스는 빨간색을 따서 심어야 빨간색 분홍색 흰색이 골고루 나온다는 것.
이름이 기억은 안 나지만 엄청 붉은 꽃은 바깥쪽을 긁듯이 모아 채취해야 한다는 것 등등.
아빠의 교육하에 우린 이동네 저동네 서리(?)를 다녔다.
아빠가 시동을 걸기만 해도 애들은 허겁지겁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봉다리의 백분의 일을 채웠는데, 아빠는 만족한다는 듯 다시 차에 태웠다.
그렇게 우리 넷은 짜장면을 먹으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