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일기 스물여덟
-
초고 (20.03.25)남의 일기 스물여덟 2021. 4. 29. 12:41
헤밍웨이는 모든 초고가 걸레라고 했다. 나는 이 말에 공감한다. 나도 정말 못 쓰기 때문에, 누구보다 공감할 수 있다. 걸레에 담긴 의미는 두 번 써야 한다는 의미이다. 한 번은 다음과 같다. 감정대로 다 끄집어 쓰기 빨강의 감정이면 빨강의 느낌을 다 쓰는 것이다. 두 번째 쓰기는 추스르는 단계이다. 아주 이성적으로 쓴다. 생각을 다듬고, 자르고, 깔끔하게 붙인다. 마치 읽을 사람에게 주는 선물 포장과 같다. 남에게 주든, 나에게 주든. 내가 글을 쓰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내 생각엔...... 일단 쓰기를 안 하면 생각은 바로 패스이기 때문에 인생이 편해진다. 감정 정리 없이 오늘도 맥주 속에 패스! 미묘한 감정이 왜 들까, 고민 없이 고뇌 속 가녀린 슬픈 여주인공이 되어 패스! 그다음, 첫 번..
-
관음증 (20.03.22)남의 일기 스물여덟 2021. 4. 29. 12:25
김성수는 365일 카톡 프사도 기본형이고 SNS도 전혀 하지 않는다. 인스타, 페북, 트위터 등등 굳이 인스타를 하지 않아도 내가 아는 사람들 혹은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어떻게 뭐 먹고 사나 구경은 할 수 있지만, 오빠는 그마저도 안 한다(유일하게 할 때는 단골 사장님이 인스타로 그날그날의 메뉴가 바뀐다거나, 휴무라던가 하는 공지들을 파악하는 정도). 그래서 내가 바라보는 김성수는 관음이 별로 없다. 요샌 그저 관음증 시댄데. 어떤 여가수가 대학 축제 때 가슴이 노출될 뻔했다고 하면 눈에 불을 켜고 아주 작은 스마트폰의 스크린을 이용해 남의 가슴까지 몰래 훔쳐볼 수 있게 됐다. 나만의 극장들이 생겨 이게 아주 은밀하게 가능해졌다. 물론 김성수도 아주아주 궁금할 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열혈 서핑을 시작하지..
-
자동멘트 (20.03.21)남의 일기 스물여덟 2021. 4. 29. 12:08
작년에 함께 작업했던 선생님은 이탈리아에 계신다. 의료 책이었다. 원고도 카톡으로만 주고받으며 진행했는데 같은 여자이고 젊으셔서 작업이 편했다. 며칠 전 독자 문의 전화가 와서 나는 양해를 구했다. "저자가 유럽에 거주하셔서 답변을 확인하는 데 시차를 두고 내일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전화를 끊고 반년 만에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다. 이러저러하니 독자에게 답변드릴 말씀을 부탁드린다고 어찌나 길고도 복잡하게 보냈던지. 물론 '편안한 저녁 보내세요'와 '환절기 감기 조심하세요' 같은, 인사치렛말도 덧붙였다. 다만 그게 요즘은 시국 멘트였다. 한 줄짜리. 그런데 나는 사실 '코로나'라는 단어를 쓰면서도 '진짜'로 생각하진 않았다. 출근 전 뉴스를 듣는데 어제의 주요 뉴스는 이탈리아의 코로나 19 하루 ..
-
투 머치 토커 저자 (20.03.20)남의 일기 스물여덟 2021. 4. 29. 11:49
디자인이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저자의 원고를 읽는데, 앞으로 구상해야 할 모든 디자인이 저자의 글쓰기 방식에서 보일 때가 있다. 그 사람도 모르게 집필을 할 때 상상하는 책의 이미지가 글로 표현된 것이다. 원고를 검토할 때 그것이 보이면 일이 재밌어진다. 텔레파시가 통한 것인가. 지루하고 단순한 교정지가 아니라 앞으로 입힐 디자인이 내내 상상되고, 완성된 책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렇게 재밌는 원고를 만났고, 담당까지 이어져 저자와 미팅을 한 이틀 전 투 머치 토커 저자와 네 시간을 내리 앉아 기가 다 빨릴 줄을 누가 알았을까. 팀장님은 글 속 저자의 의도를 알아내는 것이 편집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 했거늘! 알아주셔서 고맙고 나도 알게 해 주어서 참 고맙지만, 그래도 서로 진이 다 빠진 건 사실이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