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과 1년간 동시 휴학한 적이 있다.
새로운 경험을 원해서였으나 현실은 알바 인생이었다.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동생이 알바하는 가게 앞에 새끼 고양이를 누군가가 버리고 갔다.
퇴근 후 언제나처럼 맥주를 잔뜩 사서 집에 도착하니
좁은 집에 또 하나의 생명체가 입주해 있었다.
동생이 나를 쳐다보았을 때,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저 다시는 찬 비를 맞지 말라고 '우비'라고 이름 지어 주었다.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비를 작은 상자 속에서 버티고 있던 우비는 우리에게 와 가족이 되었다.
휴학을 마치고는 아빠가 마당에서 재밌게 키웠는데, 고양이의 본성이 사실 야생이라는 것을 이때 깨달았다.
집에서만 키웠던 쫄보 우비는 어느새 나무를 거뜬히 타고 동네 닭들과 숨바꼭질을 하며 노는 야생고양이가 되었다.
보면서 이게 우비의 본모습이구나 싶었다.
아빠는 동물을 좋아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집엔 줄곧 강아지가 있었는데, 아무도 목줄을 걸지 않았다.
다만 목줄이 없어 오고 가는 차에 치이기도 했다.
이때 나는 정말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아빠가 골든 리트리버를 키우고 싶어 했고, 엄마는 절대로 허락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굴할 아빠가 아니었다. 뒷산에 가서 송이를 캐기 시작했고
그렇게 백만 원어치의 송이버섯을 캐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리트리버 한 마리가 우리집에 왔고, 나는 '송이'라고 이름 지어 주었다.
물론 송이에게도 목줄을 걸지 않았다.
방 안에서 뛰어다니는 강아지와, 넓은 땅에서 뛰어다니는 강아지의 몸짓과 표정은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타고나기를 그런 환경에서 행복하도록 태어났기 때문이다.
나도 우비에게 중성화 수술을 시키지 않았다.
꽤 힘들었지만 그보단 나와 같은 생명체의 일부를 내가 제거한다는 게 너무 무서웠다.
선택권을 내가 갖는다는 게 더 무서웠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가치관의 차이는 누구나 있을 수 있으며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주인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존경심이 들고 감동하기도 한다.
그런데 출퇴근의 노예로 살아가는 나는 이동 범위가 주어진 채 산다는 게 가끔 슬플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동물을 키우는 데 주저한다.
지구 만한 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고래를 아쿠아리움에 가두는 것,
흙을 밟아야 제대로 발을 디딜 수 있는 강아지를 미끄러운 장판에 뛰게 하는 것,
야생성을 지닌 고양이에게 이 방 안이 전부인 세계로 환경을 쥐어 준다는 것,
분명 자기에게 더 꼭 맞는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세계가 있을 텐데 말이다.
왠지 자발적 출퇴근의 노예인 나와 비슷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