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집을 할 것도 아닌데, 3만 원이 넘는 꽃도감 책을 사서 보는 애늙은이 취미의 삼십 대 초반이 있을까? 있다. 바로 나다.
꽃은 종류별로 봉우리를 피우는 방법과 속도, 물 주기가 각기 다르다. 식물도 종류별로 잎이 나는 모양과 볕, 물을 좋아하는 정도가 다르다. 꽃을 화병에 꽂으면서, 식물에 물을 주면서 그들마다의 생김새와 취향, 약점 정도를 파악하는 게 꽤나 재밌다. 아마 저 멀리 다른 행성에 사는 외계인이 초월적인 시력을 가지고 인간 세상을 훔쳐본다면, 우린 거의 똑같이 생긴 쌍둥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종으로 구분하자면 다 비슷비슷하겠지만, 디테일하게 들여다보면 다양함도 차이점도 천차만별이다. 꽃마다 색을 내는 정도가, 식물마다 푸르름의 정도가 전부 다르다. 그 미세한 색상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이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한때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라는 시구가 유행했던 적이 있다. 나는 이 말의 의미를 꽃과 식물로부터 먼저 배웠다. 누군가는 아이에게서 혹은 반려동물에게서 혹은 예술작품에서 이 진실을 발견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아름다운 빛깔을 내는 꽃잎에서, 황홀한 라인으로 뻗어나가는 식물에게서 자세히 오래 보았을 때의 사랑스러움을 배운 편이다. 이런 점에서 꽃과 식물은 나에게 스승이기도 하다. 모든 게 순간적이고 빨라만 가는 세상에서 나의 눈길을 오래 잡아끌어주며, 그들의 매력을 탐구할 시간을 주었다. 덕분에 책 외에도 나에게 느린 호흡을 선물해 주는 또 하나의 친구가 생긴 셈이다.
한때는 느린 호흡을 선물하는 것 중에 하나로, 술도 생각해 봤다. 최근엔 거의 끊었지만 꽤 오랫동안 나는 술을 즐겼었다. 친구나 가족과 나누는 술 한 잔의 대화는 시간을 천천히 흐르도록 만들어 주는 마법과도 같았다. 사람도 느리게 성장하고, 식물과 꽃도 늦게 피어오르지만, 결국 느린 것들이 깊이를 갖게 되고 그 깊이감에 시선이 머물게 되는 것 같다. 술 한잔 하면서 그들의 눈동자를 오래 쳐다볼 수 있었고, 무언가의 깊이가 보였다. 또 그 사람의 말 속에 담긴 생각의 깊이도 엿보였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상대방의 진중한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꽤 즐겁고 새로운 유대감을 갖도록 만들어 주었다. 나는 술을 통해 배운 것이 분명히 있는 것 같다.
내가 꽃과 식물로부터 배운 것들은 다음과 같다. 꽃은 꺾는 순간부터 지기 시작하는데, 우리의 삶도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꺾어진다. 다만, 그 속에서 얼마나 나의 생김새대로 활짝 필 수 있느냐, 나만의 색을 가질 수 있느냐, 어떤 향기를 풍길 것인가를 나에게 본보기로 가르쳐줬다. 식물의 새 잎은 항상 안쪽에서부터 작게 솟아나는데, 나도 새로운 시작을 당장 내일이나 미래에도 펼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갖게 만든다. 곧 잎이 단단해져 색이 진해지는 것처럼, 나 스스로도 강해지길 기대하게 만든다. 잎이 쌓이듯 경험도 겹겹이 쌓이고, 그중에 오래된 것들은 쳐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인생과 비슷한 것 같다.
나를 찾아와 주었던 고마운 꽃과 식물들. 앞으로도 친구처럼 맞이하며 떠나 보내며 안녕하며 잘 지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