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엔 아이 한 명 더 낳는 것을, 숟가락 하나만 더 놓으면 되는 것으로 퉁쳤다. 이 말인즉, 밥만 잘 먹여 성장시키면 아이 하나를 잘 키운 게 된다는 말과 같겠다. 요즘은 좀 다르다. 딱 하나만 낳아 남부럽지 않게 키우거나, 이마저도 부담감에 안 낳는다. 먹을 것을 해결하는 것은 이제 충분히 간단한데, 그 외에 알파를 더하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안정적이게 돈을 벌어 그 돈을 여유 있게 쓰며 즐기는 삶이 가치 있는 세상이 된 것이겠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도 비슷하다. 생물학에서 번식은 그 환경에 적응을 잘했다는 의미와 같다. 자식을 많이 낳을수록 그 종은 환경에 완벽히 적응에 성공한 것이다. 여기서 뇌가 하는 역할도 똑같다. 자연에 잘 적응하고 생존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번식을 안 하는 우리 사회는 환경에 적응을 실패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겠다. 각박한 현실에 나 홀로 살아남기도 힘들고, 정신의학과는 점점 더 호황이 되어가는 세상 아니던가. 어느 때보다 뇌를 잘 쓰는 것 같은데, 문제는 항상 과부하 상태다.
맞벌이 사회가 된 이유도 여성의 지위가 올라가서라기보다는, 이제는 혼자 벌어 살 수 있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도 양 부모가 달려들어야만 충당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나는 매우 공감한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면 되지 않겠냐고 어른들은 묻지만, 옛날의 월급으로 생활하는 것과 현재의 월급으로 생활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예전엔 아이를 키우면서도 저축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저축은커녕 내 몸 하나 뉘일 집을 유지하는 데만도 돈이 전부 들어간다.
힘든 세상을 탓할 것인가, 그 세상에 적응을 하지 못한 내 탓을 할 것인가. 세상은 항상 그때마다의 이유로 매번 고단했는가, 혹은 지금이 좋은 세상인지도 모르고 불평만 하는 것인가. 꼬리에 꼬리를 물겠지만 여기에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 시대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해 가는 것은 발전된 세상에 스스로 적응해 가기 위한 뇌 게임이었다. 그 변화에는 언제나 장단이 함께 있다. 먹고사는 게 해결되니 이제는 정신적 만족을 해결해야만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나는 서른하나가 되었고, 성수와 아이 생각을 조금씩 하게 되었다. 한편으론 둘이서 사는 삶도 역시나 즐겁고 행복할 거라며 확신 아닌 확신을 한다. 매일 갈팡질팡하지만 적응의 유무를 떠나 나는 내 삶이 꽤나 만족스럽다. 분명 삼십 년을 살아오는 게 쉽지는 않았고, 앞으로도 닥칠 고통이 여전히 무섭기도 하지만, 그래도 태어나서 좋다. 고통 속에 즐거움이 있고, 사랑하는 이들이 있고, 배울 것이 많아 인식 확장의 재미도 있다. 이 기회를 나만 갖는 건 조금 이기적인 생각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