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긍정하기란 쉽지 않다. 얼굴도 안 예쁜 것 같고, 키도 작고, 돈도 많지 않은 것 같고. 각 잡고 나열하자면 하루 꼬박도 부족할 것 같다. 그렇다고 나를 부정하는 일 또한 쉽진 않다. 먹고살 만큼은 돈이 있는 것 같고, 얼굴도 아예 못 생긴 건 아니지 싶고, 키도 이만하면 귀여운 축 아닌가 정신 승리도 가능하다. 이 애매한 기준을 매일같이 넘나 든다. 그런데 도대체 이 기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연예인과 하는 비교인지, 또래 친구와 하는 비교인지, 한강뷰 아파트 주인과 하는 비교인지가 명확하지 않다. 그러다가 결국, 이 비교의 시작은 내가 나와 하고 있다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나의 세상은 결국 나의 생각이다. 다르게 말하면, 각자 바라보는 세상이 모두 다르다. 예를 들어, 폭포수가 쏟아지는 아름다운 장관을 다같이 보고 있더라도, 그날 과장이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킨 대리에겐 그 물살이 심장을 찌르는 가시로 보일 것이고, 드디어 학자금 대출을 다 갚은 뿌듯한 취준생에겐 속 시원한 탄산수로 보일 것이다. 대리에겐 폭포수가 기분 나쁘게, 취준생에겐 폭포수가 기분 좋게 보일 것이다. 분명 아름다운 폭포수는 동일하게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걸 바라보는 시선과 생각에 따라 대리와 취준생에게 보이는 자연 상태는 달랐다. 결국, 나의 생각이 나의 세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이걸 어렵게 말하면 쇼펜하우어의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가 되겠고, 쉽게 말하면 '긍적적인 자는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가 되겠다. 후자의 이야기는 종종 듣게 된다. 긍정적이게 살아야 한다는 말,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말. 분명 귀에 박히도록 들은 말인데 그런 흔한 말이 왠지 가슴에 콕 박히지는 않는다. 그래서 난 책을 읽었다. 같은 말도 각자 다르게 해석한 걸 보면, 나도 나만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되더라. 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기보다는, 내가 나만의 언어로 새로운 표현을 할 수 있게 될 때, 이때 아마 진정으로 그 말을 제대로 들여다 보고 꼼꼼히 이해한 것이 되겠다.
연장선상에서 나의 꿈은 명확하다. 인식의 틀을 꾸준히 늘려나가는 것이다. 이유 또한 명확하다. 나를 제대로 알아서 내가 편해지기 위함이다. 매번 폭포수를 가시로 볼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내가 보는 세상이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시선이 자꾸 내 안으로만 모여서는 안 된다. 그 안에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나의 재료들밖에 없다. 시선이 밖으로 향해야 한다. 새로운 재료를 손에 넣어 나의 재료와 싱싱함 정도를 저울질해야 한다. 대리를 옭아매는 기분 나쁨에서 새로운 공기를 가지고 와 본인을 환기시켜야 한다. 그러고 나서 세상을 보면 분명 풍경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저마다 색다른 시선을 가지고 있다. 내가 나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기는 아주 어렵기 때문에, 그 주인공의 시선으로 나를 볼 줄 알아야 한다. 내가 타인을 볼 땐 이성적인 판단이 잘 된다. 욕도 잘하고 비판도 잘하게 된다. 하지만 나를 볼 땐 누구나 제 잘난 맛을 확인하고 싶어하기에 자기기만이 되어버리기 쉽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듯 나를 봐야 한다. 그 방법으로 소설 속 주인공의 시선을 활용하는 것이다. 알고 보면 섬뜩할 때가 많다. 나의 감정 모순도, 자기기만도 넘쳐난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계속해서 세심하게 관찰하고 수정해 나가야 하겠다.
이거 꽤나 즐겁다. 새로운 인식의 확장은 나의 세상을 넓혀준다. 같은 폭포수를 보더라도 더 다양한 관점에서 폭포수의 아름다운 모습을 찾아낼 수 있다. 기존의 시선과 확장된 시선의 차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성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장은 역시 쉽지 않다. 내면으로만 파고 들면 기존의 규칙만 따르면 되는데, 바깥에서는 새로운 규칙을 권유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규칙 습관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참고 견뎌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존재할 테니까. 그래서 책을 읽을 때에 느리고, 귀찮고, 힘들고, 어렵게 느껴지나 보다. 마치 더디게 알을 깨고 새끼가 부화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