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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 주제에 '쉼'질도 제대로 못하는 건 무슨 엿같은 경우겠냐고, 조수석에 앉아 내가 물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여수 도로는 확실히 친구의 운전 솜씨를 터프하게 만들어 놨다. 소라는 큰 소리로 웃었다. 내 말에 매우 공감하고, 또 매우 찔린다는 뜻이었다. 나 역시 결이 같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백수는 쉬는 사람인데,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쉬는 것도 제대로 못하는 게 억울해서 한 소리였다. 여수는 어딜 가도 바다가 보이고, 짠내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서른과 서른 한 살의 두 백수는 6일 내내 붙어 다녔다.
가끔은 퇴근 시간에 맞춰 정식이 픽업을 갔다. 시장에서 미리 떠 놓은 갑오징어 때문에 빨리 퇴근하라고 독촉을 해댔다. 정식이는 소라의 남편이다. 남편이 공무원이라는 직업적 특성 때문에 소라는 팔자에도 없던 여수댁이 되었다. 워커홀릭이기도 한 소라는 여수에서 일자리를 구해 보려고 구직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절망을 하고 만다. 여수'시'로 검색을 해 봐도 단 두 페이지 만에 모든 정보를 다 훑을 수가 있었다. 내가 사는 서울은 동 단위로 검색을 해도 대가족 모두가 취업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내 대학 동기 이인조는 이곳 여수에서 살림을 차렸다.
"오늘 하루, 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저무는 태양 주제에 굉장히 따가운 빛을 보면서 내가 말했다.
"...뭐라는 거야...?"
빈 도시락 가방을 들고 뒷좌석에 앉아 있던 정식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하는 남편들과는 확실히 시간이 상대적으로 흐르는 모양이었다. 실소를 터트리며 미안하다고 한 마디 던져 주었다. 그래도 2인 1조가 된 게 소라와 나에게는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마저도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하는, 우리는 백수였다.
아마 스무 차례도 넘게 여수를 방문했을 거다. 여수에는 일곱 번의 이혼을 강행한 외할머니의 남동생이 계신다. 엄마에게는 삼촌이고, 나에게는 호탕한 여수 할아버지가 있는 곳. 할아버지는 이상하게도 나와 우리 엄마를 가장 좋아했다. 내가 외할머니는 왜 혼자 사냐고, 할머니한테는 아빠, 엄마, 나와 동생까지 있으니 내가 외할머니랑 살겠다고 했을 때부터 둘이서 자주 여수를 갔다. 긴 시간 버스를 타는 게 힘들었지만, 그 끝엔 굴구이가 있다는 사실이 땀에 찬 엉덩이도 인내심을 갖게 했다.
한 가지 문제라면 방문할 때마다 친척이 바뀌어 있었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사람은 여수 할아버지와 첫 번째 부인에게서 난 아들뿐이었다. 어떨 땐 조금 나이가 있는 할머니와 고등학생 아들, 어떨 땐 젊은 아줌마와 4살 배기 딸, 어떨 땐 굉장히 예쁜 아줌마와 이란성쌍둥이가 있었다. 누구든, 나는 비싸고 큰 전복들, 굴구이를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됐다.
"여수를 자주 왔었는데, 이번이 처음으로 여행하는 느낌이야."
아이러니하게도 소라 집에서 내가 가장 열심히 한 것은 독서였다. 친구가 정세랑 작가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래서 책장에 있는 정세랑의 책을 펼쳐 들었다. 두 번째로 많이 한 것은 산책, 아마 세 번째로 많이 한 것은 드라이브였다. 그 외의 시간들은 먹고 자는 시간으로 채웠다. 동네라는 공간을 시간을 들여 천천히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금만 나가도 바다가 보인다는 게 연신 낯선 느낌을 갖게 만들었다.
정세랑 작가의 책에서는 사람들이 자꾸만 죽어나갔다. 처음 접했던 책에서도 한 사람이 죽고 시작했는데, 소라집에서 읽은 책에서도 몇 명이 죽는 게 스토리의 첫 단추였다. 다 읽고 산 전자책에서는 네다섯 장마다 한 명씩 죽기에 이르렀다. 순간 깨달았다. 어쩌면 이 작가가 의도하는 게 그냥 나 혹은 내 연인, 가족, 친구들의 죽음일 수 있겠구나. 나와 멀지 않은, 나만 비켜가지 않을, 그리고 내 옆에 있는 누군가의 죽음 이야기.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여행인 것이고, 그래서 죽음을 인지해야만 매일을 여행처럼 살 수 있다던데. 나에게 여행 같은 하루가 얼마나 있었나, 떠올려 보니 몇 편 떠오르지 않았다.
편하다고 했다. 6일 내내. 집에서는 조급한 마음으로 책을 먹었다면, 이곳에서는 쉬는 마음으로 책을 섭취할 수 있었다. 여행이 내가 있던 모든 것으로부터 잠시 멀어지는 일이라면, 정말로 여행을 한 것 같았다. 말을 안 해도 됐다. 말을 만들지 않아도 됐다. 억지로 행동하지 않아도 됐다. 있는 그대로의 나와, 평소의 소라와 정식이가 있었다. 매끼 소라가 흥얼거리면서 만들어 낸 음식을 먹었다. 성수가 선물한 와인과 정식이가 골라 놓은 똑같은 와인을 모두 비워 냈다. 여수에서 오랜만에 진짜 쉬는 시간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