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은 항상 규칙에 맞게 제자리에 놓여 있어야 하고, 샤워를 한 후에는 몸을 더럽히는 일을 하지 않는다. 야외에서 친구들이 내 어깨에 손을 얹거나 가방을 만지면 티는 못 내지만 뭐라도 묻었을까 불편하다. 간혹 주식 끝자리 수를 '0'으로 맞추려는 숫자 강박도 있는 편이며, 오빠가 길거리의 표지판을 만진다거나 하면 곧바로 화를 낸다. 이 외에도 커피 캡슐을 바로바로 채워 넣는다거나, 장롱이 열려있는 꼴을 못 본다거나, 인덕션이 빛이 나도록 닦는다거나 하는 행동들을 한다.
이게 타고난 기질이라는 사실을 나는 얼마 전에 알았다. 8월 27일은 처음으로 정신과(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한 날이었다. 7장의 질문지에 성실히 응한 다음. 양쪽 손목, 한쪽 발목에 집게를 꽂아 자율신경균형검사(스트레스검사)를 했다. 결과가 나왔고, 상담을 진행했다.
주요 불편함으로 나는 강박과 수면을 적었다. 그리고 이 불편함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에 대해 나는 고민을 하다가 10년 정도로 적어 넣었다.
"10년이면 꽤 오랜 시간인데, 그동안 진료를 받아보시거나 한 경험은 없으시네요." 사실 나는 '강박장애'와 '강박적 성향'에 대한 차이를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위에 나열한 것들로 내가 피곤하거나, 스트레스를 받거나, 불안해서 못 살 지경이 되면 강박장애에 해당한다. 하지만 나는 저런 것들로 오히려 스트레스가 풀리는 편이었다. 손을 미친듯이 씻어대는 것도 아니고, 제자리 두기도 내가 규칙을 부여한 것들에만 한해 정리에 집착한다. 씻기 전에는 좀 묻어도 괜찮고, 청소에 있어서 어떤 부분은 나보다 김성수가 훨씬 더 깨끗하다.
"사실, 저는 강박적인 부분으로 제가 불안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들을 제대로 해 놓으면 스트레스가 더 풀리는 편인 것 같아요. 문제는 그걸 안 하면 거슬려서 꼭 해야 한다는 거지만요..."
강박적 성향은 꽤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가진 성향이 또 하나 있었으니 완벽주의 성향이다. 그런데 왜 난 지금까지 완벽하게 해 놓은 뭔가가 전혀 없는 것만 같을까... 나는 나에게 중요한 무언가를 할 때 굉장히 크게 생각해서 부담감을 많이 갖는다. 하나부터 열까지 머릿속에 꼭 해야 할 것들이 떠오르고, 그것들을 줄지어 놓는다. 그리고 그 무게와 부담감에 오히려 외면을 하면서 일단 쉬운 것들을, 그러니까 딴짓을 한다. 그러다가 막바지에 닥쳐서 전부를 해 내는 편이었다. 한마디로 너무 완벽하게 해 내려는 욕심에 딴짓을 하다가 벼락치기를 하게 된다는 이 모순적인 반복 패턴.
나쁜 습관에 나는 음주에도 체크를 했다. 얼마나 자주 마시냐는 질문에, 지금은 거의 안 마시지만 꽤 오랫동안 맥주를 일주일에 5일, 보통 1캔에서 많으면 4캔까지 마셨다고 했다. "그랬을 것 같아요. 술은 당연히 좋아할 만해요."라고 선생님이 말했다.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냐는 추가 질문에 "맥주 마시면서 영화 보는 게 가장 스트레스 풀리고 행복한 것 같아요."라고 대답하니, 이게 나의 자가치료였다고 설명해 주었다. 나는 평상시에 강박이 있고 게다가 완벽주의 성향까지 있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긴장을 항상 하고 있으며 머릿속엔 많은 생각들이 있고 큰 일에 앞서서는 완벽하게 해 내려는 부담감도 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맥주를 마시면 그 순간만큼은 이 모든 스위치를 탁 끄고 아무 생각 없이 영화에만 빠져들어 릴랙스가 되니, 이게 어떻게 자가치료가 아니겠는가. 나도 모르게 그런 시간들을 나에게 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술을 컨트롤할 수 있는 한에서만 자가치료인 셈이지, 이게 계속되면 내가 술에 전복될 터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한번 무너진 면역력과 피부병으로 카페인과 술을 10분의 1 정도로 줄인 참이었다.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하나 더 있긴 했다. "사실, 궁극적으로는 책을 읽는 거긴 한데요. 사실 책을 읽는 이유에도 조급함과 강박이 있는 것 같아요. 꼭 읽어야만 할 것 같은 거예요. 그날 하루 뭘 안 했고, 새로운 감정이 들지 않았고, 그러니까 스스로 똑같은 삶을 살거나 발전이 없는 것 같을 때 그걸 채우는 방법으로 책을 읽는 건데... 이것도 결국 제 조바심과 관련이 있는 것 같네요."
나는 매일 쫓기는 꿈에 대해서도 말을 했는데, 사실 꿈은 과학적으로도 의학적으로도 밝혀낸 것이 거의 없다고 했다. 다만, 그저 항상 뭘 해야만 할 것 같은 반복되는 생각에 그런 꿈들을 꾸는 건 아닌가. 하는 짐작을 할 뿐이라고 했다. 함께 사는 김성수가 항상 잘 자고, 또 일찍 잔다. 그래서 나도 같은 시간에 눕곤 하는데, 나는 잠에 드는 데에도 한두 시간은 기본으로 걸렸다. 예외는 있다. 그날 하루가 대체로 만족스러웠거나 신체라도 많이 사용하는 날이면 나도 잠에 잘 들었다. 그런데 억지로 잠을 청하지 말라고 한다. 오히려 침대에서 잠 못 드는 불편한 경험이 자주 쌓이다 보면, 침대는 그런 곳이라고 뇌가 자동으로 연결 짓게 된다. 그러니 억지로 자려고 하지 말고, 그냥 지루한 책을 읽거나 다른 일을 하라고 했다. "잠은 내일 자도 되지."라는 마음가짐으로 오히려 잘 자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나는 충분히 이해했다.
결론만 말하면 난 정신적으로 큰 문제는 없었다. 불안이나 우울 증상도 전혀 없었다. 문제해결 능력이나 대인관계 모두 안정적이고, 본인에 대한 자존감도 높은 편이었다. 다만 강박과 관련해서는 약을 먹으면 확실히 좋아진다고는 했다. 이때 '좋아진다는 것'은 예를 들어 어떤 것이냐면, 내가 항상 아침마다 정리하는 침구의 패턴을 약을 먹으면 안 해도 괜찮겠다고 무시할 수 있는 정도가 된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그러고 싶진 않는데'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나의 강박이 불편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마침 선생님 또한 나에게 약을 먹는 걸 추천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한마디로 약을 먹을 정도는 아닌 것이다. 나는 내가 가진 약간의 강박이 나에겐 한편으로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스트레스 수치가 매우나쁨으로 나왔다. 134. 좋음이 70~90 사이이고, 정상이 90~110, 나쁨이 110~130인데, 나는 매우나쁨인 130~150 사이로 나왔다. (매우좋음 50~70은 도대체 누구에게 있을 수 있는 수치인가 싶다.) 참 의외다 싶었다. 내 주위엔 다 있는 생리불순도 나는 어쩜 오차도 없이 날짜가 딱딱 맞곤 했다. 이 말을 들은 친구들도 "니가 스트레스가 있다고?"라며 하나같이 똑같은 반응을 해댔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해가 갔다. 평소에 긴장을 유지하고 사는데 너무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재방문은 필요가 없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나도 나머지는, 그러니까 나에 대한 모든 것들은 앞으로도 내가 해결해 가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스트레스를 낮추기는 해야 한다. 나쁨 정도는 요즘 현대인들 다 그렇다며 외면할 만도 하겠지만, 매우나쁨 수준이니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머리숱도 많은데, 갑자기 탈모도 걱정되었다...
일단 그냥 편하게 살아 보기로 했다. 뭘 해야 한다는 생각은, 일단 그걸 안 하고 있을 때만큼이라도 완벽하게 신경을 꺼 보려고 한다. 해야 할 것들을 머릿속에 계속 그리고 있지 말고, 그 순간에 하는 것들에만 집중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