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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남의 일기 스물아홉 2021. 8. 15. 14:09
중, 고딩 때는 상황이 좀 나았다.
반 친구가 스무 명 남짓. 그래도 갑자기 두 배나 늘은 것이었다!
가장 많았을 때가 내가 반 번호 18번이었을 때.
이 씨 다음으로 최 씨가 두 명, 황 씨가 한 명 있었으니 문과반 전체는 21명이었다.
그렇게 문과반 하나, 이과반 하나, 그리고 4총사(레알 4인)로 구성된 실업계반 하나가 학 학년의 전부였다.
당시 이과는 19명이 전부였는데, 그래도 19라는 숫자는 굉장히 소중한 것이었다.
내신 1등급이 딱 1명만 나올 수 있는 숨 막히는 인원수!
무조건 농어촌 전용(내신)으로 대학을 진학해야 하는데 말이다.
수능을 잘 본다는 건 사교육 없는 시골에서는 하늘에 별 따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ebs가 없었다면 우린 정말 바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한 명이라도 전학을 갔다면, 우린 급하게 1명을 수혈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초등학교 6년 동안 내 친구는 9명,
또다시 6년 동안에 내 친구는 다 해서 40명 남짓이 전부였다.
서른이 된 지금 MBTI 검사를 하면 내향성과 외향성이 각각 51%, 49% 비율로 나온다.
한편 사춘기 시절의 나는 정말(정말) 내향적이고 싶었다.
그런데 친구들이 가만 두지 않았다.
내면의 굴로 파고 들 여유조차 시골 친구들은 허락해 주지 않았다.
언젠가 일기에 쓴 적이 있지만 그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던 날씨는 비 오는 날이었다.
비가 오면 친구들이 축 쳐져서. 좀 가라앉아서. 나댐이 좀 줄어들어서...
그렇게 친구들이 좀 덜 정신사나우면 상대적으로 나는 에너지가 축적된 느낌이었다.
그래서 비올 때는 항상 내가 더 신이 나 있었다.
서로서로 친해지지 않는 게 이상했다. 우리는 관심도 골고루 주고받았다.
끝까지 외면당할 친구가 존재할 수도 없었고,
오랫동안 힘들어하고 싶어도(?) 대화 상대가 수두룩해 내면에 침잠할 틈도 없었다.
교실도 두 개뿐이었으니 대판 싸워도 내일 또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아마 도시였다면 12개 반은 족히 넘었을 것이고, 한 반에도 삼사십 명은 되었을 것이다.
싸워도 내년엔 반이 갈라질 가능성이 크니 굳이 풀지도 않았을 것이고,
혹여 같은 반이 되더라도 다른 무리의 친구들한테 붙어도 될 일이다.
결론적으론 시골에 비해 같이 맞춰 가야만 하는 경험이 훨씬 적긴 했을 것이다.
중고딩 시절은 나에게 인간관계를 끈기 있게 이어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시기였다.
스무 명.
아무리 꼴 보기 싫어도 내일 저 낯짝을 또 봐야만 하는, 짝꿍 바꾸기 때 걸릴 가능성이 20분의 1은 되는.
이래나 저래나 잘 풀고 사이좋게 지내는 게 더 이득이었다.
시골이 줄 수 있는 매리트는 이런 것들이지 않을까.
항상 같은 범위에 항상 동일하게 있는 친구들.
항상 있을 사람들을 경험 삼아 부딪치고 싸우고 화해하는 인간관계의 커리큘럼을 배울 수 있는 나의 시골.
아마 도시에서 성장했다면 내 상황은 아주 많이 달랐을 것이다.
날고 기는 친구들이 끝도 없이 많아서 잦은 시도나 기회들은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에 따른 성공과 실패의 경험조차 부족했을 것이다.
그리고 예민한 나로서는 쉽게 쉽게 친구와의 인연을 마무리지었을 것이다.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게 아마 내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