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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예찬남의 일기 스물아홉 2021. 8. 14. 14:28
백 번 생각해도 내 자존감은 모두 시골에서 키워냈다. 우리는 소수의 인원이었다. 그리고 다들 고만고만했다. 초등학교 때 내 친구는 딱 여덟 명이었다. 성비로 굳이 나누자면 나를 포함해 여자는 일곱, 남자는 둘. 6년 동안 내 사진첩에는 뉴페이스 하나 없이 항상 이 아홉 명이 있었다.
체육 시간이면 여느 학교처럼 남녀 따로 편을 갈라 흩어졌다. 그런데 남자가 고작 둘 뿐이니 축구를 하려고 해도 한 명은 만년 공격수, 한 명은 만년 골키퍼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 구도는 승부차기 연습 용으로는 기가 막힌 포지션이었지만, 나라도 그 쓸쓸함을 달래줄 걸 싶기도 하다.
그래서 점심시간마다 에너지가 흘러 넘쳤다. 급식실에서 전투적으로 밥을 먹는 남자 애들이 많았다. 1학년 걸음마부터 6학년 형아들까지 전부 모아야 겨우 팀을 짜서 축구 한 판을 할 수 있었다. 이 말은 곧, 도시에 살던 찐따 김성수처럼 언제나 경기에 한 번 끼워줄까 어물쩡거릴 필요도 없었다는 뜻이다. 시골은 누구나 다 끼워주는 게 국룰이었다. 그리고 깍두기가 존대 받는 세상이기도 하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의 마지막 졸업생은 1명이다. 덕분에 상이란 상은 모두 이 졸업생이 휩쓸었다. 과목별 우수상도 1명, 도지사를 비롯해 교장, 학부모 장학금을 받을 인재도 1명. 거의 몰빵 수준이었다. 나의 초등학교는 이 마지막 졸업생을 끝으로 이미 오래 전에 폐교가 되었는데, 지금은 스마트폰 중독 학생들을 치료하는 국가지원 학교가 들어서 있다. 어쨌거나, 이 졸업생에 비하면 우린 학년 수가 많다는 이유로 합반도 피할 수 있었다. 합반이라는 개념을 도시 친구들은 알까? 말 그대로 2학년과 4학년이 같은 반에서 수업을 받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항상 9명이라는 얘기는 라이벌도 고작 8명 뿐이라는 사실. 성적이니 대회 출전이니 경쟁률이 매번 1:8이라는 말이다. 이 사실로부터 나는 강제로 여러 가지 체험과 경험들을 하게 된다. 일례로 나의 5학년, 담임 선생님이 우리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리가 전교 1등을 했어요. 축하해 주세요! 밥이라도 근사하게 한 끼 드시고요."같은 반 친구가 9명이고 마지막 졸업생이 1명이면 대충 셈이 되야 한다. 어림 짐작해도 전교생은 전부 다 해 봐야 사오십 명. 전화를 끊은 엄마는 돈가스라도 먹으러 가야 하냐며 (비)웃음과 함께 나에게 물었다. 물론 나도 (비)웃음과 함께 됐다고 말했는데, 그래도 기분은 내자며 30분을 달려 시내에 나가 스테이크인 척하는 돈가스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언제 또 전교 1등을 해 보겠는가. 대학교 성적이 꼴등이었던 걸 감안하면, 아마 내 평생 그렇게 앞서 나가는 때가 또다시는 없지 않을까 싶다.
마찬가지로 대회를 나갈 출전 멤버도 그리 많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안 나가 본 대회가 없는 것 같다. 서예, 합창, 글짓기, 피아노, 사물놀이, 줄넘기, 수학경시 등등... 그중 가장 어이가 없던 건 수학경시 대회였다. 9명 중에 1등을 했던 거지, 예나 지금이나 나는 파워 문과 머리를 지녔다. 흔한 중2 수포자에 부끄럽지만, 수능 수학 문제의 맨 앞 장도 돌파하기 힘들었던 나는 한 혈기 왕성한 남자 선생님으로부터 큰 수모를 당하게 된다.
출전자도 모르는 수학경시대회 출전자로 선정되었다. 덕분에 나는 모두가 하교한 텅 빈 교실에 앉아 적성에도 맞지 않는 숫자들을 대면해야만 했다. 나는 정말 답을 모르겠는데, 왜 이것도 모르냐며 나를 나무랐다. 정답을 어떻게든 찍어서 선생님에게 말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너무 끔찍했다. 아무 숫자나 말한 적도 많다.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한숨이나 코웃음이었다. 압박감이 정말 심했다. 왜 모르냐고? 내가 모른다는 건 도대체 왜 모르는 거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신경성 판정을 받게 된다.
허리를 펴려고 하면 배가 찢어질 듯이 아팠다. 마치 꾀병처럼 보였을 거다. 약을 먹고 앓아누운 우리 집 앞으로 선생님이 사과를 하러 왔다. 그런데 그게 포석이었다. 대회 날짜가 지나고 겨우 등교한 날, 나는 또다시 약을 타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담임 선생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시험관 한 분이 직접 시험지를 들고 시골 학교를 방문해 주었던 것이다. 입구에서부터 그 사실을 알고는 허리가 다시금 찢어질 듯이 아팠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진짜로 꾀병이 섞였는지 모를 일이지만, 난 그때 정말로 허리를 펼 수가 없었다.웃픈 사연은 계속된다. 어부지리 대회 출전이 계속되었다. 서예로 도대회를 나간 적이 있다. 아무리 시골이라지만 허술하게 매해 '자연보호'만 출제되었다. 하지만 이미 청정 무주라는 프라이드가 가득해서 였을까. 하필 내 출전 타이밍에 '자연보호'가 아닌 다른 글자가 출제됐다. 자연보호만 주구장창 연습했던 나는 긴장과 함께 당황을 하기 시작한다. 신경성이 올라오는 것도 같았다. 갑자기 바뀐 출제어는 '우리나라'였다. 아주 단순한 글자였는데, 상대적으로도 쉬운 그 글자의 획이 도무지 잘 써지질 않았다.
깡시골은 치맛바람도 없다. 참가자의 선생님들이 '우리나라'를 써서 밑장에 깔아 주기 시작했다. 나와 같이 당황했을 아이들에게 몰래 따라 쓰라는 것이었다. 나도 내 구원자를 찾아 이리저리 고개를 둘러댔다. 하지만 나의 선생님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써 달라고 할 배짱도 없었다. 역대급으로 망친 나풀거리는 종이를 제출하면서 정말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착각이 아니라면 내가 쓴 우리나라는 아주 옅었다. 심신 안정을 위해 그렇게도 까만 먹물을 오랫동안 벼루에 열심히 갈았는데, 아마 눈물이 섞여 들어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이 주일 후, 내가 쓴 '우리나라'는 화려한 액자에 담겨 집으로 배송되었다. 무려 금상이었다. 대상이 없었으니까 내가 1등이었던 것이다. 정말 맙소사였다. 나는 그 글자가 정말 꼴도 보기 싫었는데, 엄마는 굳이 아빠를 시켜 못을 박아 내 방에 걸어 두었다. 그 못이 내 가슴속에도 박혔다는 걸 엄마는 몰랐을 거다. 명절 때마다 친척들이 그 삐뚤빼뚤한 회색빛의 글자를 칭찬할 때마다 내 얼굴도 함께 흐려져 갔다. 그렇게 시골살이는 나에게 실패할 틈도, 실수를 벗삼아 슬퍼할 여유조차도 주지 않았다. 그 후로도 나는 기계처럼 온갖 대회에 출전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은 나에게, 미리 작은 성공과 실패들을 선물해 준 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