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수역에 리사르커피집이 있다. 아직 여기만큼 맛있는 에스프레소를 먹어 본 적은 없다. 이태리에서도 아메리카노가 가장 맛있었다. 역시 한국인. '커피의 나라'인 탓인지(?) 아메리카노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구경할 수 없었는데, 관광객 때문인지 미술관에서는 팔았다. 굉장히 추운 날씨였는데 그때 먹었던 가난한 초코과자 하나와 뜨아가 내 인생 뜨아로 남아 있다. 이상하다. 인생 아메리카노를 이탈리아에서, 인생 에스프레소를 한국에서 먹었다니. 어쨌든, 출근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김성수와 오랜만에 약수역을 찾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섯 잔을 때려 넣고 있었다. 8주간의 항생제 복용으로 오랜만의 카페인 섭취였다. 후에 남산 둘레길을 걷는데 손과 발이 덜덜 떨렸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떨렸다. 오늘은 제대로 여름이었다. 양산을 썼는데도 이상하게 햇살이 양산을 뚫고 들어왔다. 손수건으로 이마와 목뒤를 연신 닦아 냈다. 오빠가 닦아 내고 난 후에는 그 손수건을 쓰지 못했다. 울창하진 않아도 초록초록한 흙길을 꽤 걸었다. 여름을 나름 즐긴 셈이었다. 나뭇잎에서 애벌레가 떨어지기도 하고, 박새가 내려앉아 있기도 했다. 문득, 새를 바라보던 김성수가 말했다. 성수: 어렸을 때는 등산을 해도 참 힘든 줄 몰랐는데! 유리: 키가 작았고, 눈앞에 것만 보니까. 순간 내가 한 말을 다시 곱씹어 보았다. 아이였을 때는 자기 키에 맞는 눈앞에 것만 보는데, 어른이 되어서는 길을 걸으면서도 머릿속에 있는 것을 보고 걸었다. 면접 결과(몰래 본), 주식, 열어 둔 창문, 마트에서 파는 수박 등 나이를 먹으며 점점 더 즐기는 것이 사라지는 이유는 생각이 많기 때문이다.